완벽한 날들

Jun
5 min readFeb 6, 2024
Photo by Hanae Dan on Unsplash

베를린에서 5주간의 구직활동 그리고 여러 과정에 놓여있는 기대와 절망, 기쁨과 슬픔이 공존하는 시간에 대해서 기록하고자 한다.

친구 또는 가족과 통화 하면 ‘너 베를린에 간지 그거밖에 안 됐어?’ 또는 ‘벌써 몇 달은 지난 거 같아’라고 이야기를 한다. 나도 체감상 몇 달은 지난 것 같다. 주말, 휴일 할 거 없이 매일 공유 오피스를 드나들며 여러 일을 하고 있다.

- 집 구하기
- 이사하기
- 안멜둥(거주지 등록) 테어민(약속) 잡기
- 외국인청 비자 테어민 잡기
- 알고리즘 | 자료구조 공부하고 문제 풀기
- 이력서 지원하기
- 커버레터 쓰기
- 면접(HR, Hiring Manager, Tech Interview, etc.) 준비하기
- 면접 보기
- 과제하기
- 스스로 끼니 챙겨 먹이기
- … etc

아인슈타인의 특수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두 사건의 동시성은 상대적으로 정의되고, 빠른 속도로 운동하는 물체 내부의 시간은 천천히 흐른다. 요즘 내 삶을 요약하면, 나는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물체다. 컨텍스트를 재빠르게 바꾸며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는 운동하는 물체다. 달력속 인간의 절대적 시간으로 5주가 지났지만, 상대적으로 내 마음의 시간은 느리게 흘러서 곱절은 산 느낌이다. 아니면 베를린이라는 공간의 시간은 느리게 흐르는 것 일수도 있다.

독일의 관공서 방문과 업무처리는 우리나라 동사무소처럼 번호표 뽑고 1시간 이내로 모든 일이 처리되는 구조가 아니다. 일단 테어민(약속)을 잡아야 하는데 약속 잡기가 대학교 때 수강신청보다 훨씬 더 정신을 고갈시킨다. 매일마다,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빈 슬롯을 위해 수시로 예약 홈페이지에서 새로고침을 한다. 무한반복과 기다림의 연속이다.

반복과 기다림

지난주부터 반복과 기다림에 대해 거듭 생각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모든 일을 추상화시키면 결국 같은 태스크의 반복과 기다림 또는 거절당하기 이다.

- (집 찾기 — 지원하기 — 기다리기 | 거절당하기..) X N
- (테어민 잡기 — 실패하기 — 빈 슬롯 기다리기 — 안 나타남 — 기다리기..) X N
- (이력서 지원 — 면접준비 — 면접 — 과제 — 기다리기 | 거절당하기..) X N

각각의 컨텍스트는 O(M x N)의 복잡도를 가지고 있다. (M = 각 컨텍스트당 부여된 태스크의 개수). 컴퓨터의 분산처리 능력이라면 여러 개의 반복과 기다림의 컨텍스트가 추가되어도 효율적으로 일을 처리할 수 있지만, 난 여기서 한 가지의 컨텍스트만 추가되어도 과부하로 뻗을 것이다.

이 과정이 왜 힘이 드는가 또는 정신을 많이 소모하는가 생각해 보니, 기다림에 그 답이 있었다. 기다림에 있을 때 아래와 같은 사고과정을 거친다.

-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어, 그냥 기다리자
- 아, 또 거절당하면 어떡하지
- 뭘 어떡해, 다시 또 같은 과정을 반복해야지
- 근데, 힘이 안 나. 결과가 어떻든 간에 기다리는 게 너무 지쳐
- 하나의 컨텍스트에서 기다리고 있을 때, 다른 컨텍스트로 넘어가는 비용이 너무 커
- 끝에 또 기다림이 있는 걸 알면서 다시 시작하는 게 힘이 들어
-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싶어, 그야말로 뻗어버리고 싶어
- 근데, 네가 선택한 거잖아. 알고 있었잖아
- 어, 맞네. 밥이라도 챙겨 먹자
- 밥 먹었으니까 졸려, 자고 싶다

그래서, 네가 뭘 할 수 있는데

기다림에 대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냥 무한히 컨텍스트를 반복하는 것 밖에는. 하지만, 기다림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서는 내가 할 수 있는 게 있다. 무뎌지지 않는 것. 기대와 절망, 기쁨과 슬픔을 그대로 누리는 것. 무뎌진다는 것은 이 감정의 줄다리기를 거절하고 부정하는 것이다.

불완전한 나, 완벽한 날

2주 전에, 베를린 노이쾰른에 있는 극장에서 퍼펙트 데이즈를 봤다.

주인공은 도쿄 공공 화장실 청소부다. 영화의 플롯은 아주 단순하다. 삶의 큰 변주 없이 아침에 마당을 쓰는 빗자루 소리를 알람을 대신해서 일어나고, 자기 전에 걸어둔 작업복으로 옷을 갈아입는다. 양치질을 하고, 문 앞에 가지런히 정렬해 놓은 열쇠를 챙기고 문을 나선다. 하늘을 바라보고 옅은 미소를 짓는다. 집 앞 자판기에서 매일 똑같은 커피를 뽑는다. 차에 타서 마시던 커피캔을 홀더에 두고, 시동을 걸고 출발한다.

그리고, 애정하는 오래된 카세트테이프를 튼다. 그의 젊은 시절의 찬란했던 날들을 회상시키는 노래들이다. 작업하러 도착하면 흔히 말하는 MZ 세대의 직원이 와서 말을 건다. 어차피 더러워지는데 왜 이렇게 열심히 해요? 그는 대답 없이 자기의 해야 할 일을 할 뿐이다. 그리고 집에 와서 100엔짜리 중고서적을 열심히 읽다 잠에 든다.

영화는 단조로운 그의 일상을 비춘다. 그리고 조금씩 생기는 변주들 가운데서 본인의 색과 빛을 잃지 않는 주인공의 단조롭지만 멋진 중심을 그려낸다. 영화 말미에 OST와 그를 비추는 강렬한 햇빛과 그의 표정이 압도적이다. 그의 단단함 그리고 동시에 삶의 변주를 사랑하는 그의 따듯한 포옹력이 그려진다.

삶의 모든 반복과 기다림, 변주를 사랑하는 그의 삶을 닮고 싶다고 생각했다.
단단하지만, 예상치 못 한 것을 성급한 판단 없이 받아들이는 그의 포용력을 닮고 싶다.
나는 불완전하지만, 아무것도 부정하지 않는 완벽한 날을 살아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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